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래를 찾는 사람들 (문단 편집) == 활동 == 1980년대에 군부독재로 인해 민주화 투쟁이 많이 벌어졌고, 그와중에 1983년 가을 즈음에 서울 시내 여러 대학의 노래패들이 자연스레 모인 것이다. 그래서 초창기 멤버는 무려 '''23명'''이였다.[* 지금은 11명으로 줄었다.--그래도 많다--] 1984년 [[아침 이슬]]로 유명한 [[김민기(가수)|김민기]]가 프로젝트 음반을 기획, 제작했으나 정권의 탄압으로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다. 1집 음반 [[노래를 찾는 사람들 1]]은 공윤의 사전심의를 뚫고 정식발매를 목표로 하면서 여러가지 타협[* 음반 성격에 맞지 않는 건전가요(!!!)도 수록되었다. ]을 할 수 밖에 없었고, 애초에 기획자 [[김민기(가수)|김민기]]와 노찾사 멤버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른 음반이 되어버린 채 1987년 발매하였다. 이마저도 당시의 엄혹한 시대상황 때문에 판매량도 많지 않았다. 그러다가 [[6월 항쟁]]으로 민주화 분위기가 도래하면서 (비록 공윤의 사전심의는 그대로라도) 노찾사는 자신들의 음악을 온전하게 발표할 수 있게 된다. 이미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면서 노찾사는 수많은 집회, 시위 현장과 대학내에서 수많은 현장공연을 하면서 자신들의 자작곡과 당대의 인기 민중가요들을 부르고 있었다. 1989년 2집 [[노래를 찾는 사람들 2]]가 발매되면서, 엄청난 대중적 반향을 일으키게 된다. 노찾사 2집은 발매 1년만에 최소한 80만장 이상이 팔린 것으로 추정되며, <[[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]]>, <[[광야에서]]>, <[[사계(민중가요)|사계]]>를 비롯해서 거의 모든 노래가 '''대중적으로 히트했다.''' 심지어 <[[사계(민중가요)|사계]]>는 TV와 라디오를 막론하고 단 한번의 방송출연도 없이 KBS [[가요톱텐]] 3위까지 올랐으며, MBC의 대학생 퀴즈 프로그램 '퀴즈아카데미'의 오프닝으로 쓰였다.[* 참고로 엔딩곡 역시 노찾사가 부른 '일요일이 다가는 소리'다.] 그외에도 학생과 노동자들의 집회, 시위 현장은 물론 다양한 장소에서 불리워지면서 노찾사 2집은 [[명반]]의 [[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|반열에 올랐다.]] 그 뒤에도 [[1990년대]] 내내 앨범 발매와 함께 투쟁현장을 찾아다니면서 꾸준히 활동했지만, 사회운동의 퇴조와 함께 노찾사의 대중적인 영향력도 시나브로 사그라들었다. 2000년 이후에는 새 노래보다는 간간히 모여서 공연을 하고 있다. [[1980년대]] 초창기 서울 지역 대학 노래패들 중에서도 엄선된 멤버들이었기 때문에, 재능이 넘쳐나는 사람들이 많았다. 노찾사를 떠나서 개인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가장 유명한 이는 바로 [[김광석]] 그리고 [[안치환]]이다. [[한국대중음악상]] 창설을 주도하고 최근엔 [[나는 가수다]] 심사위원으로 많이 알려진 김창남 성공회대 교수와 [[살다보면]]이란 포크송을 히트시켰던 [[권진원]][* 현재 서울예술대학교 실용음악과 교수로 재직중이다.]도 노찾사 출신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